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엔리코 페르미 (문단 편집) == 생애 == 1901년 철도청 직원인 아버지와 교수 어머니 사이에서 3남매 중 셋째로 [[로마]]에서 태어났다. 형이 종기 제거 수술 중에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해 사망하고 누나는 후에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개인적인 아픔이 있기도 하다. 1918년 피사대학교 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전공하였는데 1926년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됐다.[* 이 당시 이탈리아 왕립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 자격을 얻었는데, 하필이면 이 왕립아카데미의 제복이라는 게 '''중세 시대 호박바지'''에 망토를 걸치고 깃털 모자를 쓴 모양새라서 동료 교수들이 "페르미 각하"라며 놀려댔다는 얘기가 있다.] 피사 대학 입학시험 답안지는 박사학위 논문이었으며[* '소리'에 대한 주관식 문제가 나왔었는데, 진동하는 막대기에 대한 [[미분방정식]]을 세우고 [[푸리에 해석]]을 동원해서 그 해를 구하였다.] 『원자물리학 입문』이라는 책을 쓸 때에는 풀밭에 드러누워 쓴 원고를 그대로 출간했을 정도. 게다가 보통의 물리학자들이 실험과 이론 중 하나에 치우쳐 다른 쪽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 반면, 페르미는 이론 물리학자였지만 필요하면 실험도 깔끔하게 잘 해내는 만능형 물리학자였다. 심지어 논문이나 책을 쓰는 데에도 대단한 재능이 있었다. 이론 물리학자로서의 스타일도 완벽에 가까웠는데, 수학적 기교에서 당대 어느 물리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았지만 수식에 의존하기보다는 직관과 논리에 의해 이론을 펼치고 꼭 필요한 때에만 계산을 했다고 했다. 이 정도면 여러모로 완전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아내인 라우라 페르미[* 라우라 페르미(Laura Fermi, 1907–1977). 결혼하기 전에 쓰던 성은 카폰(Capon, Capone로 추정). 페르미와 함께 미국으로 건너온 이후 작가 겸 평화운동가가 되었으며, 남편이 암으로 죽은 이후엔 남편과 자신의 생활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다.]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베니토 무솔리니]]의 [[전체주의]]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고,[* 어이없는 점은 미국에 오고서도 이런저런 눈초리를 받았다. 이탈리아계 + 과학자라는 범접하기 힘든 직업 + 원래 주소에 살던 일본인 여자들 등으로 혹시 나치의 스파이가 아닐까, 하는 의심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페르미는 열렬하게 미국 정부에 협력했으며([[맨해튼 계획]] 참고) 연구시설 내지 직원 수용소(?)격이었던 [[로스 앨러모스]]로 옮기자 이곳에는 뒷담화를 까는 사람이 없다며 외려 더 편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1938년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받자마자 그대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노벨물리학상 수상과 관련해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페르미에게 '''스톡홀름에서 전화가 올 거다'''라는 소식이 전해졌고 페르미는 '''나한테 노벨물리학상 주려나?'''라고 하루종일 설렜다고 했다.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스톡홀름에서 온 전화가 아니라 친구에게서 온 전화였고, 친구를 통해서 '''무솔리니가 이탈리아의 모든 유대인들을 박해하기로 결정했다'''라는 법안의 내용을 듣게 되었다고. 그 뒤에 스톡홀름에서 노벨물리학상을 주겠다는 전화가 왔다고 했다. 페르미 부부는 설레다가 심란해졌던 하루였다고.] 망명한 이후로 미국에서 [[핵분열]] 반응을 연구, 1942년 세계 최초의 [[원자로]]인 시카고·파일 1호를 완성시켜서 원자핵 분열 연쇄 반응을 제어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런데 이것도 1939년에 시작된 맨하튼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핵분열의 제어야 말로 원자력과 이를 이용한 핵무기의 핵심 기술이기도 하고 플루토늄의 생산은 원자로로밖에 할 수 없기 때문에, 페르미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함께 핵폭탄의 아버지로 꼽히게 됐다. [[핵무기]] 제조 [[프로젝트]]인 [[맨해튼 계획]]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이것이 자발적이었는지, 타의에 의한 것인지는 말이 많다. 하지만 원자폭탄 연구를 시작한 계기는 헝가리에서 망명한 유태계 물리학자 [[https://ko.wikipedia.org/wiki/%EC%8B%A4%EB%9D%BC%EB%A5%B4%EB%93%9C_%EB%A0%88%EC%98%A4|레오 실라드(Leo Szilad)]]가 페르미에게 독일의 핵무기 연구에 대해서 경고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실라드는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에게 원자폭탄 개발을 촉구하는 편지를 쓰고서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서명을 담아 발송했고, 이를 계기로 맨하튼 프로젝트가 본격 추진되었다.] 이후 연구가 한참 진전된 이후에 실라드와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다른 과학자들이 "독일은 망해가고 있으니 핵무기 개발은 이제 그만두자"라는 탄원서를 냈을 때도 정부 측의 "원자폭탄을 만드는 게 [[제2차 세계 대전|이 비극]]을 끝내는 길이다"란 말에 설득되어 연구를 지속한 점, 미국 정부에서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소련의 핵실험 성공 소식을 듣자 수소 폭탄 개발을 결정한 점을 보면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해 보인다. 다만 맨해튼 계획 자체를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나 해당 프로젝트로의 참여가 자발적인지 아닌지가 의미가 있을 뿐이지 결국 핵무기 개발이 미국만이 아니라 강대국간의 경주 형태로 진행되었고, 당시로서는 나치독일 이후의 국제정세를 알 도리가 없었기 때문에 독일이 안 하면 미국도 안 해도 된다는 가정은 큰 의미가 없다. 1954년 핵 물리학 관련 실험을 오랫동안 하면서 노출된 방사선으로 발병한 [[암]]으로 사망했는데, 죽기 직전에도 병상에 누워 링겔의 떨어지는 물방울을 관찰하며 그 유속을 측정하고 있었다고 했다. 무언가를 수치화시키는 것을 매우 좋아해, 눈 앞에 엄지손가락을 대고 멀리 산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거나, 심지어는 속도도 측정할 수 있었다고 했다. [[페르미 추정]] 참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